2010. 3. 15.

내 삶의 횃불, 등대, 그리고 스타카토...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학교는 3주간의 짧은 방학으로 친구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고, 창가를 두드리는 세찬 눈바람 만이 텅빈 기숙사 방 외로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추운 한겨울 뉴욕의 새벽녘. 추위에 잠에서 문득 깬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몇 시인지,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있는건지,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중고등학교 때의 짧은 기억들이 희미하게나마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난 꿈많은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대신, 단 하나의 단순하고 소박한 꿈을 가진 그런 열정적이긴 하지만 재미없고 지루한 그런 학생이었다. 좋은 대학교를 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존재이유이자 내가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지향점이었다. 그런 가치관을 부모님이 내게 강요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 분들은 항상 내게 최종적인 선택권을 내 몫으로 남겨두시고 내 선택이 무엇이던간에 그에 따르는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정작 문제는, 다른 꿈을 생각해보기에 난 고등학생치고 할 게 너무 많았고, 시간은 늘 부족했으며, 체력은 항상 바닥이었다.


시간이 흘러 난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꿈꾸던 그런 대학생. 하고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고, 먹고싶은 술도 정신없이 먹을 수 있었으며, 어른흉내 낸답시고 담배도 피기 시작했다. 기대로 부풀었던, 고등학교 3년간 내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상적인 대학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딱 그것 뿐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내가 너무 어렸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순진했던 탓일까. 하고 싶었던 공부는 너무 이론적이고 탁상공론적인 탓에 내가 하고있는 이 공부가 실질적으로 이 사회에, 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효용과 가치를 제공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회의로 내 머리를 가득채워 버렸다. 술과 담배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술과 담배는 순간의 만족감을 주었지만 그 때 뿐이었다.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짧은 만남은 집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길 위에서 나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다. 공허했다. 허무했다. 모든 게 텅 빈 것만 같은 그런 허전한 느낌이었다. 이 거대한 세상, 이 무한한 우주 속에 나란 존재는 먼지같이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였던가.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거였나. 겨우 이런 껍데기 같은 삶이었던가? 나만이 갈 거라 믿었던 나 만의 나 다운 삶이라는 것도 결국 남들과 같아져버린, 그래서 더이상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런 지루한 삶. 이것이 내가 꿈꿔왔던 삶이란 말인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난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짐을 싸들고는 공항으로 향했다. 이른 새벽 공항으로 가는 길. 지하철안 사람들은 각자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내 마음처럼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줄기는 지친 내 마음을 씻어버렸다. 공허함과 허무함으로 잠식되었던, 노인보다 더 노인같던 내 마음을 씻어내렸다. 난 더이상 노인네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비록 난 이 광대한 우주에 먼지같이 작은 존재일 지라도, 내 작은 가슴과 용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우주를 덮고도 남을만큼 거대하고 위대하며 거룩하길 바랬다.


발악(發惡)하고 싶었다.


내 자신에 대한 발악.
내 삶에 대한 발악.
내 세상에 대한 발악.

사전은 발악(發惡)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온갖 짓을 다하며 악을 쓰다."

나는 내 자신에게 온갖 짓을 다하며 악을 쓰고 싶었다.
나는 내 삶에게 온갖 짓을 다하며 악을 쓰고 싶었다.
나는 내 세상에게 온갖 짓을 다하며 악을 쓰고 싶었다.

다 해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지구 끝이라도 가서 온갖 짓을 다해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모든 일에 있어 언제나 가능성만을 찾던 나였다.
모든 일에 있어 언제나 비용대비 효과를 계산했던 나였다.
모든 일에 있어 언제나 나아가기 보다 움츠리려고만, 숨어있으려고만 했던
그런 나약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가끔은 그런 모습에 스스로 연민을 느꼈던 나였다.

난 발악하고 싶었다.

모든 짓을 다해서라도, 목이 터져라 악을 쓰더라도,
꺼져가는 내 삶의 횃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고,
어딘지 몰라 헤매는 내 삶의 등대를 다시 바다로 비추게 하며,
'점점 빠르게' 밖에 모르던 내 삶의 음악이 다시 스타카토를 연주하게 하고 싶었다.

내 삶의 횃불, 내 삶의 등대, 그리고 내 삶의 스타카토...





출처: jungdolee.blogspot.com